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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결정
  • 고훈
  • 등록 2014-02-19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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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산은 도내 제2의 성지, 김성첨 토마스 등 기록상으로만 26명 순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순교자 124위(位)의 시복(諡福)을 승인했다. 이로써 103위 순교 성인(聖人)에 이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124위의 새로운 복자(福者)가 탄생하는 경사를 맞았다.


시복은 어떤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았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으며 교회에서 공적인 공경(지역교회)을 받을만하다고 교황이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시복이 되기까지는 로마교황청 시성성의 엄격한 조사를 거쳐야 하며 보통은 까다로운 기적심사도 통과해야 하지만 순교했을 경우에는 면관된다. 시성은 복자보다 한 단계 높은 성인을 호칭하며 공적인 공경의 범위가 전 세계 가톨릭 교인으로 확장된다. 시복 시성의 아랫단계로는 후보자를 일컫는 ‘하느님의 종’이 있다.


이번에 시복이 결정된 124위는 김대건 신부 등 103위 성인의 신앙적 뿌리가 된 선대 가톨릭 순교자들이다. 김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도 이번 시복 124위에 이름을 올렸다. 후대가 선대보다 먼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해박해~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우선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시복·시성에서 누락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논의는 1984년 한국 가톨릭 설립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해 103위를 시성한 이후 계속 이어져왔다. 여기에 1901년 제주교난 순교자들, 6·25 전후 근현대의 순교자들을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하고 추진 중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이번 124위 순교자 시복 결정을 선교사 없이 복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나이·성별·신분을 뛰어넘어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선조들의 삶을 이어 받는다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신앙의 본질과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로 보고 있다.


124위를 박해별로 구분하면,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되는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 53위, 기해박해(1839년) 전후 순교자 37위,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0위,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 14위순이다. 이중 24위가 전북(전주교구)에서 활동하다 순교했다. 전국적으로 서울대 교구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수다.


대표적 인물로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권상연 야고보(1751~1791)가 있다. 윤지충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진산출신 양반으로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가톨릭에 눈을 떴다. 3년의 교리공부 끝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윤지충은 권상연 등 주변 인척들에게 가톨릭을 전한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집안에 있던 신주를 태우고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가톨릭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 같은 사실이 조정에까지 퍼져 논란이 일었고 결국 1791년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에서 참수 당한다.


친척들은 관장의 허락을 구한 뒤 9일 만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시신이 썩은 흔적이 없고 피가 선명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전해진다. 윤지충의 인척인 유향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입교해 전라도 최초의 신자가 된다.


한편 익산시 여산면도 ‘순교자의 땅’으로 전주교구 내에서 천호성지에 이어 2번째 성지로 꼽히고 있다. 여산은 전 지역이 가톨릭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이 천주교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여산의 순교 장소로는 여산 동헌, 옥터, 백지사터, 배다리, 뒷말 교수형터, 숲정이 형장 등이 있는데, 백지사터와 숲정이 형장이 사적지로 조성돼있다.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 당시 여산에서는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기록은 불과 26명의 순교자를 전한다. 이 순교자들은 여산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 혹은 교수형으로 처형됐고 동헌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형이 집행됐다. 여산 지역의 천주교 순교사건은 조선 후기 천주교의 전라도 전래과정을 중심으로 한 교회사사뿐 아니라 지역사에도 의미 있는 사건이다.


순교자 가운데 많이 알려진 인물은 김성첨 토마스와 그의 가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형장에 가서야 목에 쓴 칼을 벗을 수 있었고 얼마나 굶주렸는지 짐승처럼 형장의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 때, 김 토마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려 온 천당 진복을 받을 때가 왔는데, 이만한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부디 감심하여 고통을 참아 받자”라고 모두를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이 순교하자 다른 신자들이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에 안장했다.


김 토마스와 그의 가족들은 넓은 바위(넙바위) 교우촌에 살던 사람들이다. 넓은 바위 교우촌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대아리 저수지에서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골짜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교구 8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5년 간행한 ‘치명일기’에 따르면, 여산지역 순교자 26명 중 넓은바위 교우촌에 살던 순교자 17명은 다음과 같다. 김 토마, 김 안드레아, 김 야고보, 김 베드로(홍팔), 김 마티아, 오 율리아나, 박 베드로, 이 필립보, 김 성화, 이 서방, 김 베드로, 손 마리아, 한 요한, 박 성진 아내, 전 루치아, 장 야고보, 전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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