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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로 3.1운동을 시작한 익산시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3-31 13:26:29
  • 수정 2024-03-31 13: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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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 사람도 잘 모르는 익산 이야기1
<익산투데이>는 익산시민의 정체성 함양을 위하여 ‘익산 사람도 잘 모르는 익산 이야기’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글을 쓰는 최정호 님은 익산시 여산면 출신으로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산면지편집위원과 왕궁면지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익산의 ‘숨은 이야기’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그리고 ‘자랑스러운 인물’을 찾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그 첫 번째 기획으로 1919년 익산 4.4 만세운동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독자들의 질책과 격려를 기다립니다./편집국


# 3.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1948년에 제정하여 발표한 우리나라 헌법의 첫머리는 '3.1운동이 대한민국 탄생의 뿌리'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된다. 당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던 제헌의회 이승만 의장이 헌법의 가장 앞부분에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부의 정통성을 명시한 헌법 전문(前文)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익산시가 호남은 물론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3.1운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받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타 지역민들은 물론 익산시민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3.1운동은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서 함께 일어난 범민족적 독립운동이었지만, 모두 같은 날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아우내장터의 3.1운동은 4월 1일부터 시작되었고, 문용기 선생을 비롯한 6명의 열사가 순국한 이리의 3.1운동은 4월 4일에 일어났다. 


1919년 4월 4일 남전교회 교인들이 이끈 구이리(舊裡里)의 만세운동에서 문용기(文鏞祺, 1878~1919), 박도현(朴道玄, 1865~1919), 장경춘(張京春, 1877~1919), 서정만(徐廷萬, 1889~1919), 이충규(李忠圭, 1891~1919), 박양문(朴良文, 1904~1919) 등 6명의 열사가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 현장에는 문용기 열사의 동상만 세워져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 익산시는 호남 3.1운동의 진앙지이다


그런데 익산시에서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된 바로 다음 날인 3월 2일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천도교 간부들인 박영진(朴永鎭, 1856~1928), 정대원(丁大元, 1862~1929), 김병호(金秉鎬, 1865~미상), 고총권(高寵權, 1867~1959) 등이 여산면과 황화면 등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독려하다가 체포되어 실형을 받은 것이다.


이들의 활동과 관련된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박영진(朴永鎭, 1856~1928) 본적 :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황화정 992

1919년 3월 2일 전주(全州) 천도교구를 통해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해듣자 익산군의 교구장으로서 교구 임원과 교인들을 모아 독립운동의 실천방안에 대해 의논하고 익산군 내의 기독교 측과 연락하여 독립선언서를 황화면(皇華面)과 여산읍(礪山邑) 등지에 배포하다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1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9일 고등법원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대원(丁大元, 1862~1929) 본적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운산 18

1919년 3월 2일 전북 익산군(益山郡) 천도교 사무실에서 교구임원 및 교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을 의논하고, 황화(黃華)·팔봉면(八峰面) 지역의 동원 책임자가 되어 익산군 내 황화면과 여산읍(礪山邑) 등지에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다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1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형은 변경되지 않아 8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병호(金秉鎬, 1865~미상) 본적 :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호암

김병호는 전북 익산군(益山郡)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에 관한 연락이 전주와 옥구 지역을 통해서 익산군의 천도교와 기독교 측에 전달되었다. 천도교구실의 박영진(朴永鎭)은 곧장 교구 임원과 김병호 등 교인들을 모아서 독립만세 시위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때 참여한 다른 교인들은 이중열(李仲悅)·이유상(李有祥)·정대원(丁大元)·유봉유(劉奉裕) 등이었다. 기독교 측과도 연락을 하여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천도교인이 많던 익산군에서는 천도교의 기념일인 제1세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순도(殉道)한 3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고, 천도교에서 순도기념식이 끝난 후 오후 9시를 기하여 군내 각면·각리에서 일제히 산 위에 횃불을 들고 그 횃불을 신호로 해서 만세시위에 들어가기로 했다. 김병호는 3월 2일, 독립선언문을 익산군 여산읍(礪山邑)에 배포했다. 체포된 김병호는 3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총권(高寵權, 1867~1959) 본적 :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마전 372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3일 익산군 천도교구장인 박영진(朴永鎭)·정대원 등 여러 천도교인들과 같이 이곳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금마면(金馬面) 등의 연락과 동원 책임을 맡았으며, 여산읍(礪山邑)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시위 군중을 규합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7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이들이 구속된 후 약 1주일 뒤에는 익산군 관내의 여산, 웅포, 함라, 함열, 용안 일대에서 산발적이지만 군중이 운집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산면에서는 3월 10일에 약 2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만세 시위가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원수리 신막마을에서 출발하여 여산 읍내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정(李侹, 1884~1925), 박사국(朴士國, 1888~1934), 이병석(李秉釋, 1894~1930)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웅포, 함라, 함열, 용안 등의 3.1운동은 제석교회 출신으로 군산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의 의거가 있던 신막마을에는 이곳이 3.1운동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이나 기념물이 전혀 없다. 다만 그날 체포된 인물들의 공훈록 기록 속에서만 그날의 의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되어 실형을 받은 인물들의 공훈록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정(李侹, 1884~1925) 본적 :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 628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礪山面 源水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박사국(朴士國)·이병석(李秉釋)과 이 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계획을 수립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이들은 '조선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쓴 큰 깃발을 제작하여 많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4월 1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사국(朴士國, 1888~1934) 본적 :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이정(李侹)·이병석(李秉錫)·정영모(鄭永模) 등과 함께 여산면(礪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이정·이병석과 함께 원수리(源水里) 정영모의 집으로 주민들을 불러놓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한 뒤,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고, 2백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만세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이해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병석(李秉釋, 1894~1930) 본적 :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 570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9일 익산군 여산면(礪山面)에서 이정(李侹)·이병석(李秉錫)·정영모(鄭永模) 등과 함께 정영모(鄭永模) 집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에 분발할 것을 강조하고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어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여산군 헌병분견소로 진출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해 4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全州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신막마을의 마을회관 자리는 가람 이병기의 아우이며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이병석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람의 가계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3월 10일 여산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국가공훈록에 등재된 위 세 사람 중 이정(李侹)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숙부이고, 이병석(李秉釋)은 가람의 아우라는 점이다. 그런데 가람의 조카이자 전주예총회장을 지낸 작촌(鵲村) 조병희(趙炳喜, 1910~2002)가 쓴 『완산 고을의 맥박』에 수록된 내용에 의하면, 3월 10일 여산의 만세운동에 가람의 부친인 이채(李採, 1868~1948)와 중부인 이신(李信)도 함께 참여했는데,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가 다행히 풀려났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가람의 가계인 연안 이씨 종중의 지회장이며 저헌학문연구소장인 이지희 박사가 주도해서 가람의 생가 터에 세운 이채의 행적비에도 새겨져 있다. 


이처럼 여산의 3.1운동은 가람 이병기의 가계가 대거 참여하였으며, 가람의 부친인 이채 선생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3.1운동 당시 여산공립보통학교의 교사였던 가람은 그 시기를 전후하여 교사직을 사직하고 만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미지가람 생가에 있는 이채 선생의 행적비 뒷면에는 그가 3.1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캡션 그러면 가람의 부친 이채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이채 선생은 변호사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등록된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계의 종사자 명단에는 그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그는 대한제국 시기나 조선시대에 변호사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검색이 가능한 문헌 기록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변호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가 애국계몽단체인 호남학회(湖南學會)를 대표하는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뭇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선각자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채 선생이 임원으로 활동했던 호남학회에는 ‘3.1운동의 민족대표 48인’으로 알려진 임규(林圭, 1867~1948),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을 비롯해 당대의 호남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회원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생부 김경중(金暻中, 1863~1945)과 양부 김기중(金祺中, 1859~1933년)도 있었는데, 그 인연 때문이었는지 이채 선생은 1909년에 김기중이 부안군 줄포면에 설립한 영신학교(永新學校, 현 줄포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초빙받게 된다. 


두산대백과사전은 호남학회의 대표 인물로 이채 선생의 이름을 표기했다.

가람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애국지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익산시의 과제

앞서 열거한 내용 외에도 우리나라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익산시의 명문가와 종교계가 스스로를 희생하며 헌신한 사례들은 결코 적지 않다.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은 경주 이씨 문중의 이기영(李琪榮, 1849~1922), 이규홍(李圭弘, 1877~1928), 밀양 박씨 문중의 박이환(朴駬桓, 1873~1953), 진천 송씨 문중의 송태식(宋泰植, 1884~1946)을 비롯한 항일의병들이다. 


또한 고현교회, 대장교회, 서두교회, 동련교회, 제일교회 등 일제의 강압에 맞서 싸운 개신교 교회들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또한 익산시는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인 3.1운동을 서울 이남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곳으로, 호남 지방 3.1운동의 진앙지이다. 따라서 익산시는 3.1운동에 크게 기여한 자랑스런 역사를 내외에 널리 알리고, 시민들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익산시의 현충시설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군산이나 전주ㆍ완주ㆍ정읍 등 비교적 가까운 지역들과만 비교해봐도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익산시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하며 분발을 기대한다.


위 사진은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공원 내에 있는 홍보물을 촬영한 것이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익산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산에 사는 이채 씨가 일진회(一進會)를 성토(聲討)하는 글을 기고했다는 내용을 게재한 1910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 2면 기사


글쓴이

최정호<익산근대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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